선학동 천연학 촬영지 구경가세요~
봄볕이 지긋이 기우는 오후, 강진만 푸른 물빛을 따라 천년학을 만나려 선학동을 찾아 갔다. 사실은 천년학이 아니라 선학동 나그네가 되어 세트장과 노란 유채꽃을 보러 나선 것이다. 그 곳은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촬영지이기도 한 곳 이어서다.
국도 2번 도로 장흥 나들목에서 천관산 이정표를 보고 23번 도로를 따라 솔치를 넘으면 천관산이 보인다. 산정의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어 천관처럼 보인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산치고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천관산을 올려다보면 가슴이 울렁인다. 가을엔 억새로 장관을 이룬다
남도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장흥은 산과 바다의 고장이자 문학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 송기숙, 안병욱, 박범신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다 이 고장 출신들이다. 그 중 이청준은 장흥 회진인 자신의 고향을 대부분의 소설 무대로 설정하였다. 서구적인 소설을 한국적 토착화를 시켰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일관되게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등에서 소리를 주제로 삼은 것이다.
관산읍을 지나 회진면으로 들어서자 특유의 비릿한 바다 냄새가 회색의 톤과 함께 묻어났다. 산길을 휘돌자 바다 가까이 다가왔음을 바다는 먼저 냄새로 알려 준 것이다. 예전에는 회진 포구이던 이곳에서 보면 덕도가 간척지 저 쪽에서 섬 아닌 섬으로 남아 있다. 갈라진 길마다 세워진 선학동 안내판이 먼저 마음을 들뜨게 한다. 잘 포장된 길은 바다를 끼고 길게 산허리를 따라 돌고 있다.
간척지를 지나면 왼편으로 바다가 열린다. 말똥 같은 탱자섬 너머로 노력대교가 운치 있게 걸려 있다. 바다는 오후 햇살을 받고 옅은 회색으로 반들거린다. 바다는 바다 같지 않을 때가 가장 바다다운 줄도 모른다. 산비탈을 돌아 돌고개에 올라서니 선학동 노란 유채밭이 먼저 반긴다. 방죽 아래에는 작은 어선 몇 척이 정박해 있고 언덕에는 붉은 스레트 지붕을 인 낡은 주막집이 오래 전부터 그렇게 있었다는 듯 세월을 지탱해온 모습으로 소슬하게 앉아 있다. 유봉과 동호, 송화의 한 서린 소리의 현장이다. (소설에는 아비와 여자와 손이다) |
천년학의 무대인 주막집을 둘러본다. 운치 있게 휘어진 소나무 몇 그루를 벗하며 바다를 향해 그리움을 쏟아 내듯 그렇게 앉아 있다. 조금은 처연한 분위기이다. 방죽 아래는 배 몇 척이 한가로이 정박해 있고, 물 빠진 바다에는 검은 김발이 숭숭이 꽂혀 있다. 저 바다를 보면서 눈 먼 송화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한스러운 창을 불렀을 것이다. (사실은 눈이 멀어 바다가 보일 리 없지만 그는 감각으로 들물 날물을 알아 차렸고 바닷물이 차오르면 한을 토하듯 창을 불렀다) |
주인장이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며 회한의 사연을 되새기고 있을 손(동호)의 모습과 슬프디 슬프게 소리를 하는 눈먼 여인의 모습도 그려 본다. 아비의 유골을 안고 돌아 온 여자의 한스런 창이 한 마리의 학이 되어 저 바다 위를 떠돌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야기 속의 선학동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이다.
되돌아 관음봉을 본다. 마치 학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형상이다. 지금은 간척지가 되어버린 들 건너 산자락에 선학동이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상 산저리다, 지금은 산저리보다 선학동으로 더 알려졌고 주민들 또한 그렇게 여기고 있다. 유채밭에서 만난 최귀홍 이장의 명함에도 선학동으로 새겨져 있다. 선학동과 천년학은 그렇게 마을 사람들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산허리를 돌아 고개를 넘으면 이청준의 생가 마을이다.
이청준이 산저리를 왜 선학동이라 불렀을까? 고달픈 속세를 유토피아적인 선의 세계로 끌어 올리려 함이었을까? 아니면 선학이 되어 가난의 땅을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었을까. 그러나 선학동 나그네에서는 동호가 이곳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도록 만들어 놓고도 애틋한 사랑은 끝내 완성시켜 주질 않았다. 어차피 비련으로 끝날 일이라면 한 마리의 학으로 상징화시켜 모든 사람들의 가슴 깊이 새겨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선학동엔 지금 유채꽃이 만발했다. 만일 저 간척지가 예전처럼 바닷물이 출렁이는 포구였다면 관음봉은 노란 유채꽃을 둘러치고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작가는 선학동 포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흔들리지 않는 명경 같은 바다 위로 천년학을 날리고 싶었나 보다. ‘선학동 나그네’는 전편과 같이 가족들이 품고 있는 소리에 대한 한을 남도의 창에 실어 예술로 표현하기 위해 관음봉 위를 나르는 학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다. 이야기는 내내 바닷가의 작은 주막에서 화자인 주인과 청자인 손을 통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소리라는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 내고 있다.
유채꽃밭에서 보면 멀리 빨간 함석지붕의 주막집이 바다를 향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바다로 나아가고 바다를 안고 싶은 모습이다. 소설 속의 주막집이 더 소설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덕도에세 넙도까지 이어진 바다가 그리움을 실어 나르듯 또 다른 바다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서편제'의 이미지가 청산도의 청보리밭과 돌담길이었다면 ‘천년학’은 마을 앞 포구이자 주막집이다. 임 감독은 매립되어 논밭이 되어버린 포구를 보고 그 정경이 얼마나 애석했으면 그래픽으로 재현했을까? 영화의 입지적인 조건과 영상미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여기서 깨닫는다. |
마을 뒤 낮은 관음봉은 마치 학과 같아서 바닷물이 들면 산 그림자가 학이 되어 바다 위를 나른다고 했다. 관음봉 자락 유채밭에서 만난 촌로에 의하면 전에는 바로 마을 앞까지 배가 드나들었다며 바닷물이 찰방거리던 그때의 마을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선학동은 이제 날개 꺾인 학이 되어 더 이상 물 위를 나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
마을 사람들은 상상의 천년학을 위해 현실의 유채꽃을 심어 노란 세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선학동 나그네 보다 먼저, 아니 천년학 보다 먼저 유토피아적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운치 있게 세운 원두막 주변에서는 나이 지긋한 초로의 마을 아주머니들이 유채꽃전을 붙이고 있다. 막걸리와 함께 천년학을 풀어내는 산자리 이장의 구수한 입담이 듣기 좋았다. 가을에는 메밀을 심어 축제를 열 것이며 내년에는 청보리도 심어 일 년 내내 선학동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겠단다.
막걸리가 몇 순배 돌자 우리 일행인 소리북이 구성지게 호남가를 뽑았다. 듣고 있던 시골 아낙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이장님의 누나인 초로의 여인네는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멋쟁이에다 노래 실력도 보통이 아니어서 지긋하게 눈을 감고 뽑아 올린 ‘자옥아~!’ 노래 솜씨가 일품이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살아 있는 천년학이다. 선학동 유채밭 위로 울려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눈먼 여인은 천년학이 되어 관음봉 위를 날고 있을 것이다.
봄볕이 관음봉 위에 걸칠 때 즈음 꽃밭 길을 따라 선학동을 벗어났다. 못내 아쉬운 듯 손을 흔들어 대는 촌로들과 이장님, 그리고 자옥이가 원두막 아래서 밝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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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 후기
영화 천년학에는 서편제의 주인공들이 또 다시 등장한다. 아비역인 소리꾼 유봉(임진택)이와 딸 송화(오정해), 아들 동호(조재현)가 그대로 출연한다. 그런 까닭인지 영화를 보면서 속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편제와 같이 유봉이 데려온 두 남매는 양 아이들로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그들은 소리와 북장단을 통해 애틋한 사랑을 싹틔우지만, 윤리는 이들에게 사랑의 절제를 요구한다. 동호가 가출을 하고 난 뒤 의문스럽게도 송화는 눈이 멀고 유봉과 송화도 주막을 떠난다. 이때부터 동호와 송화는 짧은 만남과 긴 이별로 교차되는 세월 속에 살게 되고 동호의 송화에 대한 그리움이 집념으로 송화를 찾는 이아기가 주를 이룬다. 이 부분은 소설에 없는 영화화한 것들이다. 화자인 주막집 주인이 들려주는 소설만의 특유한 분위기가 증발된 채 영화는 지역과 시대를 따라 줄기차게 애틋한 사랑을 찾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서편제가 판소리의 심오한 득음의 경지를 위한 우리 음악을 중심에 두었다면, 천년학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소리라는 매체를 등에 업은 사랑이야기인 것 같다. 따라서 영화 천년학은 소설 선학동 나그네에서 느끼는 신비스럽고 처연하며 비감어린 감정은 간 곳 없다. 선학동 주막집에서 주인의 회고조로 전개된 소설의 긴장감과 호기심과 신비스러움은 증발해 버리고 동호와 송화의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사랑 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 영화의 거장이라는 임권택의 100번 째 영화치고는 적이나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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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조금이나마 다행인 것은 동호역인 조재현의 깊고 슬픈 눈빛과 한껏 성숙한 오정해의 소리 연기가 그래픽으로 복원한 아름다운 선학동 포구와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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