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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정희 전대통령의 마지막 하루
머 루
2012. 4. 21.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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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shfun59
글쓴이 : 그린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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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대통령의 마지막 하루 ♣
(10.26. 그날의 진실중) | |
나는10 . 26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던 부마(釜馬) 사태의현장에 있었던
이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과이 사건의 후폭풍인 12 .12사건을
장기간 취재해 왔다.
이런취재는 박대통령 전기(傳記) 집필로 이어졌다.이 책은 내가 1997년부터 1999년 말까지 [조선일보] 에연재했던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운데10 .26사건을 다룬 부분만 뽑아낸 것이다.
요사이 새삼스럽게 10 . 26사건이사회적 논쟁거리가 되고이 사건을 잘 모르는 젊은층이 많아져 이책을 내게 됐다.
내가 10 . 26사건을 취재하면서개인적 호기심을 풀려고 한 대목이 있다.
박 대통령은 과연 가슴 관통상을 당하고도"난 괜찮아" 라고 말했을까.
나는 10.26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주요 인물들을거의 다 만났다.
물론 거기에는 그 최후의 만찬장에 있었던 세 생존자도 포함된다.김계원金桂元(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심수봉沈守峰(가수),그리고 신재순申才순(여대생).이들 중 신재순 씨의 증언이 가장 정확했다.
신씨는 는 대담한 성격인 데다가 기억력과 표현력이 대단했다.
하느님이 그녀를 박정희의 최후 목격자로 선택했다는느낌이 들 정도였다.
![]() <한가한 시간에 피아노 치는 박 대통령>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5분,
김재규金載圭의 권총 발사로 가슴을 관통당해 등에서 피를 괄괄 쏟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을 혼자서 안고 있었던 이가 신씨였다.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은 팔에 총상을 입고 실내 화장실로,
김계원 씨는 바깥 마루로, 심수봉 씨는 김재규가 다가 오는 것을 보고 달아난 이후 신씨만이 대통령을 피범벅 속에서 안고 있었다. 김재규는 합동수사본부 수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차지철을 거꾸러뜨리고 앞을 보니 대통령은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어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대통령에게 다가가자 여자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권총을 각하의 머리에서 50cm 거리에 대고 쏘았습니다. "이 순간을 40대의 중년의 중년여성으로 변한 신재순 씨는 이렇게 기억했다(1997년의 증언) "그 사람의 눈과 마주쳤을 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짐승의 눈이었어요. 그가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문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바깥이 좀 조용해지자 신씨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대통령은 실려 나갔고 문 앞에 차 실장이 하늘을 보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신씨가 일으키려고 손을 당겼다. "차 실장은 몇 번 힘을 써 보다가 포기하는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난 못 일어날 것 같애." 그러고는 다시 쓰러져 신음하는데 그 눈빛도 잊을수가 없어요. 그날 밤 차 실장은 김재규 부장을 자극하고 약을 올리듯 막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차실장이 고마운것은
석유파동 직후 대통령은
여름 어느날 박 전대통령이 낮에 점심시간을 이용해 이발을 하면서 상의와 와이셔츠 를 벗고 이발의자에 앉았는데, 박전 대통령이었다. 잔디밭에 같이서서 몇장의 사진을 찍은후 흐믓한 표정으로 여직원의 어깨를 두드려주던 그 생전의 모습을 잊을수 없다고 전속이발사는 고개를 숙이며 한참을 울었다. 이승만 대통령시절 지은 진해별장(확실한지?) 이 너무낡아 여름휴가 전에 박실장과 정회장이 의논해서 다시 개조해 놓았고 박 전대통령의 가족이 휴가가 시작돼 진해로 내려와 별장이 아닌곳에서 하루를 묵게되었고, 조바심이난 박실장은 별장 개조건을 말씀드렸다 대노한 박대통령이 당장 짐을싸 서울로 돌아가자고 흥분하며 왜 너희들 멋대로 일을 처리하느냐며 야단쳤다. 그때 연락을받고 정회장이 들어와 한시간을 얘기한 끝에 화가 풀렸다고한다. 나라돈을 사사로운 개인을 위해서 쓰는것에는 엄격했다는 박 전대통령 이었다. 지난해 3월 22일 내방에 올렸던 목련꽃을 닮았던 그분이 그리워 *** 중에서 발췌. 박대통령이 경부 고속도로 공정 점검차 헬기를 타고 지방으로 향하던중 엔진고장으로 수원의 밭에 불시착을 하지요. 헬기가 노후해 부속이 낡았기 때문이지요. 측근들이 새로운 헬기 도입을 수차 권하였으나 달러를 쓸수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 합니다. 그리고, 그는 찝차를 타고다니며 민정시찰을 했습니다. 십여년이 넘도록 서너대의 찝차만을... 1964년엔가 독일 방문을 했을때 한국 교민인 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울고 말지요. 가난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그들의 고생에 목이 메였기 때문에... 미처 말도 다 끝내지 못하고서...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그가 또울자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이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며 위로하고... 파월 장병을 월남에 보내놓고 밤새 담배를 피웠던 박전 대통령 이었습니다... 독일과 월남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이 나라의 경제 개발은 힘을 받아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지요... 해진 혁대. 궁정동에서 총상을 입고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김계원 비서실장이 안고 있는 중에
대통령의 장부. 박 대통령 부속실에서는 세가지 장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족장부"는 대통령을 제외한 두 딸과 한 아들의 잡비 씀씀이를 다룬 것이었다. 1979년 10월에는 27만 9, 388원이 지출됐다. 2층 내실 담당 가정부 미스 원에게 10만 원, 신당동의 대통령 사저를 관리하고 있던 박환영 본관에는 식당이 있었다.
지금 노씨의 부인 권씨는 강남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의 옷(한벌당 기백만원)을 한번에 서너벌씩 구입해입는다한다. 남편의 봉급에서, 아니면 증권에 투자해 번돈으로.? 설마 판공비로 쓰지는 않기를 바랄뿐... 지금도 석연치 않게 규명이 제대로 안되는 서너건의 게이트 사건들.. 제발 퇴임해서 법의 심판없이 평범한 시민으로
육영수 여사 1968년 육성.
출처 푸른바다님 네이트블로그.modrige님 포스트에서 인용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 버리려 다짐했건만 잊어 버리려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1974년 9월4일)박대통령 일기에서..
![]() <장모 이경령 여사와 육여사 묘소를 참배한 박 대통령> ![]() <박지만씨와 서향희씨 박대통령 묘소참배,
박근혜 대표와 함께>
지만씨의 아들이 태어나 박 대통령의 가통을 잇게 된것을 축하 합니다. |